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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컬럼 내려놓기-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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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완 

그림 김현정

 

내려놓기

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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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서문

 

대개 사람들은 ‘서문’을 읽지 않는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나 결혼식의 주례사처럼, 

중요한 본론을 기다리며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 절차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나도 책을 몇 번이나 읽고 나서 더는 새로움을 느낄만한 텍스트가 없을 때, 그제야 서문이나 작가의 말을 읽었다.

 

그럼에도 내가 서문을, 심지어 장황하게 적는 이유는 오로지 부족한 글 실력 때문이다. 

주제를 미리 밝히지 않고는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꼭 읽어 주셨으면 한다. 미리 장르를 밝혀 두자면, 이는 자전적 소설이다.

 

모든 것을 담은 지도(map)

 

수술과 암 진단이라는 풍파 앞에서 불안에 떨던 그때, 도움을 얻고자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9할은 광고였다. 벼랑 끝에 선 자들의 희망을 먹고 자라는 괴물들.

그 사이에서 겨우 찾아낸 수기도 의심 많은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2006년에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굿바이>의 주된 무대인 엠파이어 호텔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노트가 있다. 

그 노트에는 오직 자신의 실패만을 기록할 수 있고 성공담은 적을 수 없다. 

후대 사람들이 그 성공담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성공 사례가 현재 상황에 들어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나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밝은 길’보다는 힘들 때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정도(正道)에서 벗어났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함정이나 어두운 현실은 어떤 게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내가 기대한 글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길, 함정, 밝음, 어둠, 이 모든 것을 담은 지도(map)를 만들겠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만큼은 내가 만든 지도를 통해 더 나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이유도 추가되었다. 

암환자 중에는 발견 당시 이미 증상이 심각하여 경과가 안 좋은 분들도 많지만,

요즘에는 진단 기술의 발달로 초기나 무증상일 때 우연히 암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얼마 전까지 내 옆에서 멀쩡히 일하던 사람이 심심풀이로 검사를 했다가 암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바로 나처럼… 모르고 있었을 뿐 어제같이 술 마시던 그 사람의 몸 안에는 이미 암세포가 있었던 것이다. 

진단 전후로 달라진 것은 오직 ‘병식(病識)의 유무’ 뿐.

 

암을 진단받기 전에 나는, 아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암 환자’하면 이런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링거를 꽂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고통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환자의 모습. … 

나는 이런 편견을 깨고 싶었다.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유방암에 걸린 조정석이 멀쩡히 

출근하고 공효진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리고 싶었다.

 

이번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2년간 동고동락했던 공보의 3년 차 형들이 소집 해제되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으쌰으쌰 축구하고 배드민턴 치고 골프 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몇몇은 결혼하고 몇몇은 개원하고 또 몇몇은 좋은 자리에 취직했다. 

취직을 못 하고 헤매던 학창시절 친구들도 취업에 성공하고, 취업한 친구들은 어리바리 신입사원 티를 벗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하루가 다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과 달리 병마에 발목 잡혀 나아가지 못하던 나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홀로 침전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새 ‘글 쓰는 행위’는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등불이 되었다.

‘뒤처지는 게 아니야. 오랜 꿈이던 책 쓰기에 투자하는 중이지. 조금 느릴지는 몰라도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욕망의 집합체


이렇게 글을 쓰는 목적이 하나둘 추가되다보니, ‘이 글에 과연 주제가 있기는 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나왔다. 방 청소를 하다 발견한 대학 시절의 정리 노트였다. 

그 안에 적힌 매슬로(Maslow)의 욕구 단계 이론에서 나는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매슬로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 충족이 상위 단계 욕구의 발현을 위한 조건이 된다고 본다. 

매슬로의 이론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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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생리적 욕구’

 

생존에 필요한 본능적 기능에 대한 욕구로서 수면/식사/배설 등이 이와 관련되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졌다. 

삶의 질이 극도로 나빠진 말기 환자는 불면증이나 섭식장애 등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나의 경우, 입원 초기에 수면 및 배뇨 문제로 생리적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는 불편을 겪었다.

 

2단계 ‘안전의 욕구’

두려움이나 혼란스러움이 아닌 평상심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암 진단이 가져오는 충격, 불확실한 미래, 처음 겪는 치료과정 등은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며 

이때 두려움과 혼란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암 진단과 뇌수술이라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수용할 때까지 나에게 안전의 욕구를 채울 방법은 없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암 환자는 1단계와 2단계 욕구 충족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를 거친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며 인간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대부분 극복하고, 더 높은 욕구에 눈길이 간다.

 

3단계 ‘애정과 소속의 욕구’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전반적으로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것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대개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통을 느끼고 스트레스나 임상적인 우울증에 취약해진다.

 

치료를 위하여 좁은 공간에 유폐되어야 했던 시간에서 벗어난 암 환자들은 더 많은 사회적 교류를 원하게 된다.

늘 마주하고 있는 가족이 아닌, 친구나 동료들과의 소통을 바라며 더 나아가 연인과의 만남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암 환자가 1, 2단계 욕구결핍에 허덕일 거라고 착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구토나 어지러움 같은 신체적인 문제보다는 애정과 소속감의 결핍이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항상 갈구했지만, 사람들은 어느 나이나 상관없이 제각각의 할 일로 바빴다.

 

4단계 ‘존중의 욕구’

 

주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낮은 수준의 존중감’과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높은 수준의 존중감’으로 나뉜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성취감, 자유, 독립성을 추구한다.

 

이때, 암 환자라는 꼬리표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은 크게 없다. 다만 ‘술자리에서 혼자 물로 건배하기’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무심코 환자임을 자각한

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이벤트임을 느낄 때 존중의 욕구는 결핍된다.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정하고, 그 경지까지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구이다.

상태가 중(重)하든 경(輕)하든 상관없이 암은 죽음에 대한 한 번쯤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변화를 주기도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설정한다.

 

나는 자수성가를 하고 싶었다. 돈 걱정 없는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성공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시키려 했고, 그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소망했던 ‘책 쓰는 한의사’는

단지 목표를 위한 발판으로 그 뜻이 변질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지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삶의 기조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 결과 작가로서의 꿈은 본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글의 목적을 정리해 보면…

 

지도(map)를 만들고자 했던 목적은 ‘안전의 욕구’를 돕기 위함이고, 

암 환자에 대한 오해를 깨고 싶다는 목적은 선입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함이며, 

이 시간이 헛됨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 목적은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에 맞닿아 있다.

 

즉 나의 ‘존중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 그리고 환자의 ‘안전과 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돕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지질학자 데렉 에이거(Derek Victor Ager)는 이런 말을 했다.

 

“지구상에서 한 지역의 역사는, 병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의 권태와 짧은 순간의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여기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의 암과의 투쟁기록은, 병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의 권태와 짧은 순간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렵사리 만난 사람들이 보내는 연민의 눈빛과 위로의 말도 부담스러웠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관심이 거짓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참, 내가 환자였지. 

아직은 위로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구나.’ 하며 갑자기 찾아온 환자라는 자각은 썩 달갑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자꾸 반복되니 먼저 연락을 보내는 것도 한때는 꺼려졌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처음처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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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이 자격지심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준 고마운 글귀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의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위로보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해주셨으면 한다. 힘을 주고 싶다면 칭찬하면 된다. 

운동을 하고 있다면 몸에 근육이 붙었다고 칭찬하고, 마음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굴이 밝아졌다고 칭찬하고.

 

한마디로 이 글은 욕망의 집합체이다. 다만 모든 욕망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에 글 대부분은 독백이다. 

되도록 겉으로 드러난 현실은 과거 시제, 마음속 이야기는 현재 시제로 기록하였다. 

어긋난 부분도 많이 있지만, 초보자의 실수 또는 시적 허용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란다.

 

 

02

기다림의 시작

 

지난 금요일부터 심상치 않던 두통이 주말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왼쪽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은 때때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살짝 어둑어둑해서 바꿀까 말까 고민하던 형광등 불빛,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에도 

짜증이 치밀어 올라 방에 틀어박혀 불도 끄고 누운 채 주말을 보냈다.

 

문제는 출근이었다. 운전할 때 두통이 발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안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운수 보건지소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같이 근무하는 신경과 전문의인 승현이 형을 찾았다.

 

“형, 주말 동안 두통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조그마한 빛이나 소리

에도 신경이 거슬리는 게 딱 migraine1)증상이에요.”

“어디 한번 보자.”

 

형은 간단한 문진과 함께 이곳저곳을 눌러보더니 긴장성 두통과 편두통이 혼재된 상태 같다며 지소에 있는 약을 찾았다.

 

“동완아, 여기에 딱 맞는 약은 없다. 적당한 거로 조합해줄게. 이거

먹고도 별 차도 없으면 처방전 써줄 테니까 약국 가서 약 타.”

 

“넵! 이거 먹으면 괜찮겠지.”

 

“그리고 MRI 한번 찍어봐. 지난 여름부터 이상한 맛이나 냄새가 나면서 살짝 어지럽다고 했었잖아.”

 

“네, 그랬죠. 형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서 stem2) 문제라는 둥,

seizure3) 가능성도 있으니 temporal4)일수도 있다는 둥 엄청 겁줬죠.”

 

“그래, 그 이후로 별 이상 없이 잘 돌아다니길래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 두통도 있고 하니까 찍어보는 게 어때? 

너 이런 두통 처음이라면서?”

 

“가끔가다 통증은 있었어도 이런 패턴은 처음이죠.”

 

“그럼 신경 많이 쓰이고 좀 불안하잖아.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보니까

MRI상 문제없다는 얘기만 들어도 두통 강도가 확 줄어드는 케이스 많이 봤다.”

 

“심리적 안정감 때문에 덜 신경 써서 그런가보죠?”

 

“그렇지. 찍어서 이상 있으면 빨리 발견해서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좋고.”

 

“약 먹고도 아프면 찍어볼게요. 돈도 돈이라서.”

 

“그래.”

 

뇌압상승3징후


형이 지어 준 약은 효과가 좋았다. 불편함 없이 지내면서 두통의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두통은 야속하게 병원이 쉬는 주말에 다시 찾아왔다. 

단단히 체한 듯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워 주체할 수 없었다. 

주말에나 가끔 얼굴을 비치는 아들이 집에 와서는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만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탈까? 

괜찮다고 말해도 어머니는 방에 찾아와서 살펴보다 울상을 지으며 떠나셨고, 어머니의 걱정에도

 

1) migraine: 편두통. 일반적으로 편두통은 머리의 한쪽에서 나타나는 두통을 의미하지만, 의학적으로 편두통은 일측성, 박동성 통증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고

구역이나 구토 및 빛이나 소리 공포증이 나타나는 특징적인 두통을 의미함.

2) stem: brainstem. 뇌줄기, 뇌간(腦幹)

3) seizure: 간질 발작

4) temporal: temporal lobe. 측두엽

 

통증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을 토하고, 

속을 다스리는 침을 스스로 자침(刺鍼)한 다음에야 조금 가라앉아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의 두 번째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독특한 행운의 법칙이 있었다.

주말이나 밤에 열이 39도까지 오르다가도 학교 가야 할 아침이 오면 모든 증상이 싹 사라졌다. 

그 덕에 18년 동안 결석 한 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은 ‘의무에는 특화된 놈’이라며 나를 놀려먹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월요일처럼 평범한 기적이 일어나 나를 기어코 진료실 의자에 앉혀 놓을 것

이라 여겼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어지러움이 더 심해졌고,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본과 3학년 심계(心系)내과

뇌압상승 3징후

두통, 구토, 유두부종

 

‘승현이 형 말대로 MRI 찍자. 혹시 모를 불안감에 떠느니 그게 낫겠어.

MRI 비용으로 심리적 안정을 사는 셈 치자. 어차피 이대로는 출근 못 해.’

 

바로 운수 보건지소의 김 여사님께 연락해서 병가를 부탁하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일생동안 많아 봐야 스무 번 남짓밖에 가질 수 없는 날이 있다. 작년에도 없었고 내년에도 없는 2월 29일. 고등학교 교사인 어머

니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7살 터울 어린 여동생의 대학 입학식이 있었던 그날.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 2월 29일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동생 입학식도 있고 컨디션도 별로라서 오후에 MRI를 찍으러 가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

을까 하는 기대도 섞여 있던 결정이었다. 그러나 어지러움은 점점 더 심해져 갔고 누군가가 내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짓누르는 것처럼 괴로울 뿐이었다. 결국, 바람 빠진 주유소 풍선 인형마냥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어머니 차에 타야 했다.

 

이 근방에 유일하게 MRI 기기가 있는 K신경과. 거대한 메디컬 빌딩의 3개

층을 차지한 어마어마한 규모였지만, 병원은 환자들로 가득 차 대기실 의자가 남아나지 않았다.

 

‘좀 일찍 출발할걸. 괜히 뭉그적거렸네.’

 

기약 없는 기다림
 

일찍 출발하자던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접수 데스크로 가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어렵사리 구한 빈자리마저 잃을까 두려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몸 상태가 영 별로라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집을 다섯 채쯤 짓고 부술 때쯤 겨우 마주할 수 있었던 의사는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진 뒤

칼로릭 테스트(caloric test)6)를 지시하는 것으로 진료를 마쳤다. 3시간을 기다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 남짓.

같은 의료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막상 환자가 되니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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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칼로릭 테스트(caloric test) : 온도유발안진검사,

전정기능검사의 가장 기본이다.

 

내 뒤에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환자를 생각하며 검사실로 이동하여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30분 정도를 더 기다려 MRI 검사실로 이동했다. 검사실은 꽤 웅장했다. 

별 이상이 있을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잔뜩 긴장한 채 기기에 누우니 방사선사가 다가왔다.

 

“기계가 아주 시끄러우니까 귀마개 꼭 끼세요. MRA도 같이 찍으니까 좀 오래 걸릴 겁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정말 기다리기 힘드네요.”

 

“환자분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에요. 이게 오늘 MRI 마지막 촬영

이거든요. 조그만 늦었어도 다음에 예약 잡고 오셔야 했을 걸요?”

 

방사선사가 쥐여 준 손때 묻은 귀마개. 수많은 사람들의 귓구멍을 거쳤을 거라 생각하니 영 찝찝했지만, 

그냥 귀에 꽂았다. 내가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던가. 그리고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귀마개를 했는데도 굉장히 시끄러웠다. 소음 속에서 40분을 보내고 나오자 바로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이제는 판독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지겹다 진짜. 이제 좀 그만 기다리고 싶다. 도대체 몇 번을 기다리는거야. 

기다렸다가 의사 만나고, 기다렸다가 MRI 찍고, 기다렸다가 진료 받고. 

오늘 하루만이니깐 참는다. 나중에 개원하면 난 절대로 환자 오래 기다리게 안 할 거야.’

 

그렇게 10시간 같은 1시간을 기다려 만난 의사는 나와 부모님께 MRI 영상을 보여 주었다. 

MRI 영상은 내 눈에도 참담했다. 짙은 회색을 보이는 우뇌와 달리 좌뇌는 한없이 흰색에 가까웠고 좌우에 하

나씩 있어야 할 뇌실이 우측에만 있었다. 심지어 좌뇌가 너무 부푼 나머지 우뇌를 밀고 있어 중심선까지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 일반인이었어도 좌우의 심각한 불균형에서 무언가 좋지 않음을 느꼈으리라.

 

“상태가 좀 심각하네요. 여기에 하얀 부분이 보이죠? 하얗게 보이는 것은 수분이 많다는 이야기인데, 

수분이 많다는 건 부종을 의미하거든요. 좌우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좀 있죠? 이러면 뇌압이라는 게 많이 올라가서, 굉장히 어지럽고 토하고 싶었을 겁니다. 맞나요?”

 

“네, 며칠 전 밤에 토했습니다.”

 

“이렇게 뇌가 붓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보다는 큰 병원에 가서 더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네요. 

환자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학 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금방 괜찮아질거예요. 큰 병원 가서 부기 빼는 약 먹고 하면 다 잘될 겁니다.”

 

설명을 마친 의사는 종합병원에 보낼 진료의뢰서를 준비하며 어머니께 다시 물었다.

 

“어느 병원으로 해드릴까요? K대 병원은 여기에서 좀 멀고, Y대 병원이랑 C대 병원이 가깝네요. 어디 가고 싶으세요?”

 

나의 이성은 그렇게 무너졌다


사람은 급하면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 C대 병원은 익숙하다 못해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나는 툭하면 그 병원에 입원했고 그곳에서 받은 수술만 두 차례였다.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나기를 거기에서 했으니 그것까지 합하면 총 3번. 

심지어 천식 때문에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내원해야 했던 곳도 C대 병원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나를 태어나게 하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의사 선생님들 밑에서 배우는 모습을

상상하며 C대 의대에 원서를 낼까 고민도 잠시 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온 한의사의 길을

포기하기 싫어 한의대에 진학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난 C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었다. 어머니도 내 마음을 안 듯 C대 병원을 선택하셨다.

 

시일이 흐른 후에 어머니께 C대 병원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천식 발작으로 Y대 병원에 입원했다가 2차 감염되어 엄청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거기는 피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도, 아버지도 치료해 준 병원이기에 나도 치료해 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고 하셨다.

 

진료의뢰서를 받아들고 C대 병원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도로는 퇴근시간과 맞물려 주차장이었다. 

나는 한참을 고생한 끝에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 후미진 곳에 하나 남아 있던 빈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또다시 시작된 기약 없는 기다림. 가만히 있는 주인공 뒤로 바삐 흘러가는 배경, 

‘스텝 프린팅 기법’이라고 하던가? 딱 그 느낌이었다.

MRI 영상을 본 뒤 극심해진 공포감과 응급실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은 나와 세상의 연결을 끊어 버렸고, 

그때부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허깨비처럼 의식 속을 둥둥 떠다닐 뿐 도저히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응급실 구석에 방치되어 있기를 두어 시간. 조급해진 어머니와 아버지는 번갈아 자리를 비웠다. 

필시 의사나 간호사를 붙잡고 우리 아이 좀 봐달라고 하소연하고 있겠지. 

나도 몸만 멀쩡했으면 “응급실에 온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습니까?” 소리치며 화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응급실에서 의료진을 향한 폭력이 많다는 것이 일면 이해가 되었다. 마음이 급해서이다.

 

부모님의 애원이 먹혔는지 인턴이 와서 몇 가지 검사를 하고 갔다.

 

‘인턴이 와서 검사했으니, 이제 어느 과로 보낼지 결정하겠지? 신경과일까? 신경외과일까?’

 

오늘이 2월 29일인 걸 감안하면 방금 다녀간 인턴은 국가고시를 갓 통과한 꼬꼬마임이 분명하다. 

엉성한 손놀림이 영 못 미덥긴 했지만 병원 시스템을 믿으며 처치를 기다렸다. 

얼마 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왔다. 또 인턴이었다. 아까 했던 검사를 그대로 한 뒤 떠났다. 

응급실 전달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뢰는 깨졌고 그 빈자리는 불안이 메웠다. 

불안해진 마음은 이내 딱딱한 침대가 주는 불편함과 그보다 더 불편하게 앉아 있는 부모님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화(火)로 변했다. 

네 번째로 찾아온 인턴은 심지어 제일 처음 왔던 인턴이었다. 결국, 애꿎은 사람에게 분노가 쏟아졌다.

 

“아까 오셨잖아요. 쌤 말고 다른 쌤도 와서 똑같은 검사하고. 응급의 학과 레지 쌤들에게 제 검사 결과가 가긴 했나요? 

여기 온 지 몇 시간인데 왜 레지던트는 한 번도 안 옵니까?”

 

“지금 사람들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평소 나는 잘못은 수뇌부가 하고 항의는 콜센터 직원이 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었다. 

결정권이 없는 사람에게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불만을 표시하도록 만든 시스템에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아무 힘없는 인턴에게 짜증을 부렸다. 훈련소에서 같이 생활한 응급의학과 형이 해준 이야기와
동기들이 인턴 시절 고생했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익히 병원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기다림’의 가혹함 앞에서 나의 이성은 그렇게 무너졌다.

 

신경질을 한바탕 부린 덕분인지 얼마 뒤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나타났고 간단한 문진을 몇 개 하더니 부모님을 모셔갔다. 

결정할 사항이 많은 듯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부모님을 기다리던 내 귀에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그 소리는 응급실 한편에 마련된 방에서 흘러나왔다.

 

“수연아, 엄마 여기 있어. 눈 떠봐, 수연아. 엄마 왔어. 수연아, 수연아, 수연아아….”

 

수없이 이름을 불러보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용한 응급실에 들리는 건 오직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뿐. 

그런 처절한 절규도 오래가지 않아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뒤이어 들리는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얼마 뒤 또다시 한 무리의 의료진이 뛰어간다. 이번에는 죽은 손녀와 까무러친 딸을 본 할머니가 쓰러진 것이다. 

3대에 걸친 비극.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응급실에는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고 있었다.

 

예전에 고등학교 한의사 동문회 술자리에서 익렬 형님이 해준 조언이 기억났다. 

자기가 너무 게을러졌다고 느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생각될 때는 대형 병원 응급실에 하룻밤 있어 보라고, 

그러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알겠노라고 대답하는 내 머릿속에는 TV에

나오는 응급실이 떠올랐다. 밀려드는 응급환자를 대처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의료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놓은 조명, 신음하고 있는 환자, 보호자와 의사의 대화로 시끌시끌한 실내…. 

그러나 막상, 지금, 당장,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응급실은 달랐다. 

조명은 동틀 무렵 하늘처럼 잔잔해서 오히려 어둑하게 느껴졌고, 실내는 환자들의 신음만 간간이 들리는 적막의 극치였다. 

보호자 없이 혼자 와서 간호사를 애타게 찾는 할아버지의 외침도, 아이의 죽음을 두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통곡도 이내 삼켜버리는 무서울 정도의 고요함. 

마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나도 응급실에게 목소리를 빼앗겨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감에 일부러 아버지께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엄마는 어디 갔나?”

 

“니 입원 준비한다고 짐 싸러 갔다. 내일 아침에 올 거야.”

 

막 진급하고 임용된 전공의와 간호사들이 존재하는 3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응급실. 그날 컨트롤 타워는 부재(不在)했다.

나중에 들어 안 것이지만 그날 신경외과 병동에는 빈자리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초대받을 수 없었던 우리 가족은 뜬눈

으로 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점심에야 비로소 병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이후로 한동안 병원 문밖을 못 나가리라고는…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출처- On Board 2017 SUMMER ' 내려놓기 - 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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