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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컬럼 내려놓기-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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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완 

그림 김현정

 

내려놓기

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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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잊혀진 시간

 

"여기가 어디야?”

“병실이지.”

“아니, 과가 어디냐구.”

“신경외과.”


‘외과…. 수술을 해야 하는 건가?’


유년시절의 기억, C대 병원 복도


자리가 이곳밖에 나지 않았던 걸까. 2인실이었다.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상급병실이라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허나 장소만 바뀌어도 잠들기 어려워하고 누가 옆에서 코라도 고는 순간, 날밤 새우기 일쑤인 나에겐 6인실보다 2인실이 훨씬 나은 것도 사실이었다. 

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부모님께 부담이 될까 싶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욕망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신경외과 병동이고, 652호. 2인실. 설명은 내일 회진 시간에 들을 수 있다는 말이지?’


대강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서자마자 제일 처음 취한 행동은 현 상태를 친한 공보의 형들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병실로 찾아왔다. 어젯밤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부터 걱정하던 이들이었다.
명색이 의료인이라는 녀석이 일반 환자처
럼 설명 하나 듣지 못하고 마냥 방치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면허증을 반납하라고 어찌나 타박을 하던지…. 그 타박이 미안했던 걸까.

위로도 하고 상황 파악도 한다며 병실에 나타났다.


“여기가 김동완 환자 병실이 맞나요?”

“어, 덕경이 형 맞아요. 나기 형이랑 용현이 형도 왔네요.”

“그래, 그래. 몸은 좀 괜찮나?”

“많이 어지럽네요. 특히 고개를 돌리거나 체위를 바꾸면 더 심하고.”

“병원에서는 별말 없고?”

“내일 회진 때 이야기해준다고 하네요. 그것 말고는 아직.”


“보니까 너한테만 말 안 한 게 있는 모양이네.”

“진짜요?”

“잠시만, 일단 부모님들께 인사드리자.”

“아, 네.”


“동완이 아버님, 어머님, 맞으시죠?”

“아유, 휴일인데 우리 애 아프다고 이렇게 찾아와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남의 일도 아니고 동완이 일인데요. 오히려 옆에 이렇게 의사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게 정말……. 저희가 죄송합니다.”

“아무리 의사선생님이라도 어찌 알겠어요. 저도 동완이가 집에만 오면 머리 아프다고 누워 있어도 그냥 두통인 줄 알고 진통제 몇 알

주고 넘겼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게 어찌나 후회가 되는지….”

 

낯선 장소에서 만난 낯익은 얼굴들. 반가웠다.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던 현실이 이 방문을 통해서 제 궤도로 돌아갈 것만 같은 마음에 안심도 되었다.

 

‘이제 형들이 파악을 잘 해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겠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별 거 아니겠지? 

아니지. 뇌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별 거 아닌 문제가 어디 있을까. 이미 과도 신경외과인데….’


이제는 무슨 일이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그 결과가 가져올 현실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형들의 등장은 오직 ‘무지가 주는 불안’만이 가득 차있던 마음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불어넣었고, 그 때문에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

어 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갈비뼈가 부서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다.


‘K신경과에서 받아온 MRI 영상을 형들이 빨리 판독하여 결과를 알려주는 것.’


이 순간을 위해 MRI 영상이 담긴 CD도 잘 보관해두었고, 어젯밤에는 어머니께서 노트북도 챙겨왔다. 모든 게 완벽했다, 

분명히. 노트북을 부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매한 지 5년이 넘어 종종 오류가 나곤했지만 그래도 느리게나마 작동되던 노트북이 갑자기 먹통이 될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어쩜 이럴 수 있을까. 만약 이게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재미삼아 한 장난이었다면 그를 향해 살의를 불태웠으리라.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전원버튼은 눌러댔지만 모니터는 까만 화면만 띄울 뿐이었다. 결국 위로도 하고 상황 파악도 할 겸 찾아왔다던 형들은 위로만 남긴 채 돌아갔다.

 

나의 상태를 제대로 알게 된 건 3월 2일. 응급실로 병원에 들어온 지 이틀, 병실에 온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회진 때 찾아오신 교수님은 병명은 뇌종양이며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수술 때 떼어낸 조직으로 생검하여 진단한다고 말씀하셨다. 

수술 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이라고 했다. 수술까지 남은 시간은 5일 남짓.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걸까, 꼭 남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뇌종양? 그렇구나…. 에휴, 집에 가고 싶다.’


문학소년이던 고등학생 시절, 그때 읽었던 소설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삶의 특정한 시기는 종종 구체적인 어떤 거리의 풍경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도 비슷한 거리가 있는지를. 그리고 떠올랐다. ‘C대 병원의 복도’가.


유년 시절, 나는 호흡기가 많이 약했다. 누군가 1년 중 마스크를 낀 날이 많았는지 끼지 않은 날이 많았는지 묻는다면 낀 날이 

훨씬 더 많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호흡기가 약했다.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을 늘 달고 살았고, 환절기만 되면 감기에 걸렸다. 감기도 일반 감기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부비동염이나 중이염 같은 못된 녀석을 대동하기 일쑤여서 동네 의원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종합병원까지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그 병원이 바로 C대 병원이었다.


‘잔반 없는 날’이라는 슬로건 하에 맛있는 급식이 나오고, 수업도 일찍 마쳐 친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수요일. 

그날 나는 C대 병원에 갔다. 어떤 주는 아파서, 어떤 주는 검사하러, 또 어떤 주는 경과를 관찰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1시’라 적힌 예약증을 들고 병원을 찾아갔다.

학기 중에는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이모의 손을, 방학 중에는 마찬가지로 방학을 맞이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예약증에 적힌 숫자 ‘1’. 그 숫자는 실상, 시작을 알리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진료가 이루어진 것은 대개 3~4시쯤이었으니까. 

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약을 타서 병원 밖을 나설 때면 이미 해는 뉘엿 뉘엿 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원에 가고, 

병원에서 나오면 해가 져버리는, 유년 시절 수요일은 항상 이 모양이었다. 수요일이 월요일보다 더 싫었다.


으레 큰 병원이 그러하듯 진료시간과 검사시간은 언제나 짧았고, 

그 찰나의 순간을 제외한 긴긴 나머지 시간을 ‘C대 병원 복도’에서 보냈다. 

거무튀튀한 녹색 아스타일 바닥, 곳곳에 놓인 낡은 나무의자, 거기에 앉아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 풍경을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스마트폰 아니 휴대폰조차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수없이 바닥의 검은 얼굴을, 

의자 수를, 우는 아이의 수를,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어른의 수를 헤아렸으니까.


아픔으로 대표되는 유년시절, 그 기억의 근원인 C대 병원. 병원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어린아이가 자라서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을 가질

만큼 세월이 흘렀음을 알려주듯 그곳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개에 불과하던 건물은 4개로 늘었고, 지저분해 보였던 아스타일 바닥은 번쩍번쩍 빛나는 대리석 바닥으로 교체되었으며, 

딱딱한 나무의자도 푹신한 의자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입원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지어진 지 가장 오래된 건물 라파엘관에 있었다. 신경외과 ICU와 간호사실이 있는 6층,

652호.


652호는 문이 한쪽에 치우쳐 달려 있었다.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는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이 다음으로 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오른편은 벽이었다. 편의시설이라고는 구식 히터와 조그마한 냉장고, 소형TV가 전부였는데 모두 창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곳곳에 손때가 묻어 있고 실금이 가 있던 벽 한가운데에는 조그마한 십자가상이 달려 있어,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를 예수님께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자리는 복도 측이었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병실이 매우 좁았다. 2인실인데도 개인 공간은 6인실과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그마저도 먼저 병실을 쓰고 있던 아저씨가 텃세를 부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게다가 창가에 자리한 그가

항상 그와 나 사이에 커튼을 쳐놓은 탓에 나는 햇빛도, TV도 볼 수 없었고, 그의 침대 앞을 지나가면 불편한 기색을 내

비치는 탓에 냉장고를 쓸 때도 눈치를 봐가며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화장실이 가까워서 좋네. 이걸로 위안 삼자, 동완아.”

“뭐, 어쩌겠어. 그래야지.”


병실을 살피며 울상을 지으시던 어머니께서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실은 그것 또한 마냥 장점인 건 아니었다. 

화장실 갈 일이 잦은 아저씨를 위해 간호사들은 밤에도 화장실 앞 조명을 켜둘 것을 부탁했는데, 그 조명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서 잠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불을 켜게 만든 장본인이 커튼으로 빛을 모두 가려버리고 코를 심하게 골며 자는 동안, 정작 나는 안대의 불편함과 귀마개 너머로 들리는
코골이 소리에 잠
을 설치는 어이없는 상황. 그렇게 병원생활은 시작되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한 번 항의할 법도 한데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아서도, 참을성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무서워서였다. 혈액검사를 자주 한다며 간호사에게 소리를 치고, 아내의 병간호가 마음에 안 든다며 폭언을 하고, 장인 장모에게 화를

내고, 병문안 온 부하직원에게 일처리가 왜 그 모양이냐며 신경질 부리는 그가 너무 무서웠다.
그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 어떤 몽니를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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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간만에 만나는 대학동기와 동문선배,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공보의 형들…. 빵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케이크와 병원에서의 지루함을 달랠 책도 함께 챙겨왔다. 

참 고마웠고, 허투루 살지는 않았구나 싶어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특히 어지러움의 강력한 지배 아래, 침대에 구속되어버린 나에게 손님과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은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러나 병실은 손님을 맞이하기에 너무 비좁았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자기가 근무했던 병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병실도 좁고 휴게 공간

도 없는 구식 건물을 욕했다. 당장, 옆의 데레사관만 하더라도 깔끔하다며 원래 신경외과는 병원 내에서도 가장 낡은 곳에 배정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환자 상태가 급하다 보니 보호자들이 병실 여건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 나의 상황 같아 서글펐다.


수술을 앞둔 3일 전, 병문안 왔을 때 손을 한번 써볼 테니 잠깐 기다려보라던 지만이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각별히 신경써줄 것을 부탁했으니 마음 편히 쉬고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수술할 때 집도의 말고도 다른 교수님 한 분이 더 참관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지만이 형의 배려가 무척 감사했다. 

이 일은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또 한 명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었다.


본과생이 되면 공부할 내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각자 과목을 하나씩 맡아 시험 준비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맡은 과목은 ‘심계(心系) 내과학’이었다. 심계는 서양의학에서 순환계와 신경계를 포괄하는 개념인데, 순환계는 다른 동기가 맡았고 나는 신경계 파트를 맡았다.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님의 수준을 맞추느라 다른 서적도 참고해가며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각종 MRI, CT 사진 보는 방법부터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 질환의 진단법 및 특징 등을 요약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 정리 학목 중에는 ‘뇌종양’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병의 특징이나 예후에 대해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뇌종양은 두개강(頭蓋腔, intracranial), 즉 ‘두개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종양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다. 

만원버스를 상상해보자. 여기에 불청객이 난입한다. 그러면 그 안에 이미 타고 있던 승객들은 어떻게 될까? 벽으로 밀려 짓눌리기도 하고 빈자리를 찾아 출입문 계단으로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뇌종양도 마찬가지이다. 종양세포라는 불청객이 두개강으로 난입하게 되면 정상 뇌조직은 눌리고 고통받게 된다. 

심하면 구멍을 찾아 뇌가 흘러나가는 ‘헤르니아(hernia)’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크기와 성장속도는 뇌종양의 매우 중요한 변수다.


뿐만 아니라 병변의 위치 또한 중요하다. 뇌는 모든 기능을 관할하는 장기이기에 제거에 소극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생명을 주관하는 부위나 깊숙한 심부(深部)에 종양이 발생할 경우 치료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이와 같이 양성과 악성의 구분도 중요하지만 크기와

성장속도, 위치, 그 이외에 subtype도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병이 바로 뇌종양이다.

예전 기억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지금의 상황이 더 실감나고 무서워졌다. 상상해보았다. 두개골을 잘라내고 뇌를 열어 이상조직을 제

거하는 모습을. 생각은 본과 1학년 때의 해부실습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 2시간 넘게 톱질해도 잘 쪼개지지 않던 두개골

- 악취를 풍기며 나타난 뇌

- 시신을 기증한 큰 뜻에 경의를 표하며 잘라보았던 뇌조직들


나를 수술할 집도의에게 경외심이 생겼다. 실수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스쳤다. 

하지만 그 실수는 내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 파급력이 궁금해졌다. 덕경이 형은 재활의학과 전문의

다. 아마 수술 후 재활하는 환자를 많이 보았으리라. 형에게 물었다. 답은 금방 돌아왔다.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회복을

기준으로, 보행이나 운전 같은 ‘gross motor

(대근육 운동)’은 6개월. 글씨 쓰기 같은

‘fine motor(소근육 운동)’은

12개월이 소요된다.


이 정도가 통상적이라 했다.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겨버렸다. 사실 그 파트는 재활의

학과 담당이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뇌수술을 앞둔 환자는 누구나 짐작하지 않을까? 수술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일들

을 말이다. 특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마련이다.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때 아닌 고찰이 시작되었다.


이걸 ‘테세우스의 배’1) 문제라고 하던가?

판단력이 사라져 버린 ‘나’는 ‘동완’인가?

예전 기억이 없어진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은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현재는 과거

의 선택들이 모인 집합체이다. 선택의 기억이 없는 ‘나’와 선

택 기준을 잃어버린 ‘나’가 과연 ‘동완’일까? 판단력이나 기억, 둘 중에 하나

라도 남아있지 않다면 ‘동완’의 영혼은 거기서 끝이다. 비록 숨 쉬고 있더라

도 그 안에는 있는 영혼은 ‘동완’이 아니다.


‘아니 무엇보다 수술 후에 내가 살아있을 수는 있을까?’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두려워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아무 흔적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두려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어렵사리 구해온 노트에 모든 것을 써내려갔다. 지난 삶에 대한 반성과 수

술 이후의 계획,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까지 모두 적었다. 아무렇게

나 떠오르는 대로 적지 않고 과거와 미래, 현재를 구분해서 기록했다. 만일

의 상황에 다른 누군가 보더라도 헷갈리지 않게.


사실 병실에 올라온 후부터 수술 전 날까지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영화

1) 물체의 연속성의 정의에 대한 논제 중 하나 〈그래비티〉의 한 장면처럼 한없이 펼쳐진 암흑 속에서 헤매는 심상(心象)만

존재할 뿐. 실수로 ‘저장 안 함’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부분만 싹 빠져 있다. 그때도 하루는 분명 24시간이었을 텐데, 찾아와준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시간들, 검사실에서 방치된 순간의 막막함만 띄엄띄엄 기억난다. 지금 이렇게 지난 시간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도 순전히 노트의 덕분이다.

 

노트의 공은 이뿐만이 아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그 시간 동안 많은 이에게서 받았던 사랑도 되새기게 해주었고, 힘들었던 그때 도대체 어

떤 생각을 했는지도 남겨주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냥 공포에 지배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는 자부심도 함께 주었다. 

금도 가끔씩 마음이 힘들 때면 그때의 기록을 보곤 한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은 많은 것을 남겨주고 조용히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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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떠날 준비

 

수술을 위해서 극심한 뇌부종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스테로이드 주사가 하루에 4번 정도 투여되었다. 마약을 하면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고 했던가? 

스테로이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깊은 굴속에 숨어버린 나를 바깥으로 꺼내기에 충분했다.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잠시 나와 바라본 세상은 정말 눈부셨다. 

금만 머리를 움직여도 마치 뇌가 한 발짝 늦게 움직이는 듯한 어지러움이 찾아와 거동하기가 굉장히 불편했지만 스테로이드를 맞고 난 뒤 한두 시간 정도는 괜찮았다. 

그때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도 하고, 잠시 산책도 하고, 손님도 맞이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때론 귀찮다 느꼈던 앉고 일어서고 걷는 행동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역시 가치는 희소성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기심을 가득 담은 기도


“중환자실에 대개 1~2주 정도 있는 것이 기본이다.”


수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형들은 아껴두고 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몰랐다. 응급상황이 아니라면 수술 후 중환자실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옆 침대 아저씨가 하루에도 수십 번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일주일이 살면서 제일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투덜거렸지만 그건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가 중환자실에 그만큼, 아
니 그보다 더 오래 있을 거라니…. 그 말을 듣자 때늦은 의문이 생겼다.


‘아저씨는 왜 중환자실이 지옥 같았던 거지?’

‘일주일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의식이 돌아오면 바로 병실로 오는 거 아니야?’


떨리는 마음으로 단체 채팅방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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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다른 형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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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다. 충격이 마구 밀려온다. 나는 아마 같은 층에 있는 신경외과 전용 ICU2) 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기저귀를 갈아준 간호사

와 병동에서도 계속 마주쳐야 한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얼굴 들고 간호사를 볼 자신이 없다. ‘이 간호사는 내 기저귀를 몇 번이나 갈았을

까?’ 하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절로 상상된다. 그렇다고 마냥 간호사가 올 때마다 자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수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떨고 있는 나를 위해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를 조성한 모양인데, 그 목적은 매우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제 수술 자체보다 중환자실의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

 

‘아, 젠장. 중환자실에서 똥 안 싸는 방법 어디 없나?’


혼란스러운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밤 12시부터 금식이라며 꼭 지켜달라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상관없어. 대변 때문에라도 오늘 저녁부터는 굶으려고 했으니까.’


부모님께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계속 회고록을 써내려갔다.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아 1분 1초가 아깝던 차에 잘 된 셈이었다.

오히려 글 쓰는 것에 집중하니 배고픔, 중환자실에서의 배변 문제, 수술에 대한 공포들이 잠시 뒤 편으로 밀려나기까지 했다.

 

2) Intensive Care Unit, 중환자실 집중치료실 


  

한참을 쓰고 노트를 덮었다. 할 만큼 했다. 더 적고 싶은 게 많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수학에는 골드바흐의 추측을 비롯하

여 풀리지 않은 수많은 난제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해결된 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가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난 이 문제에 대한 진실로 경탄할 만한 증명을 찾았다.

하지만 여백이 좁아 이곳에 남기지 않겠다.”


나는 페르마의 이 한마디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다만 이야기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남은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야기를 하다 말 바에는 가슴에 담아 두는 게 낫다.
영 아쉽다 싶
으면 돌아와서 마저 적으면 된다. 여한 없이 다 적어버리면, 정말 떠날 것만 같아 하나쯤은 남겨두었다.


11시가 되고 병실의 불이 꺼졌다. 야속했다. 영원히 잘 수 있는 마당에 왜 이렇게 빨리 밤이 찾아온 걸까? 하루만 더 살고 싶었다. 어둠을

먹고 자라난 공포가 밀물처럼 슬금슬금 밀려왔다. 밀어내지만 더 큰 물결로 마음 가장자리를 삼켰다. 의연하겠다는 다짐은 갯벌에 쓴 글 씨처럼 허망하게 쓸려 내려갔다. 무서웠다.


덕경이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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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종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종교는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절에 다니는 이모도 결국

가족과 주변 사람의 ‘평안’을 기원하러 가는 것이고, 성당에 다니는 소꿉친구의 어머니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모습들이 실제의 종

교가 추구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생각했다.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부처님과 예수님 앞에 복을 욕심낸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았다. 

러나 상황이 급해지니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절대자를 붙잡고 다짜고짜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번에 받은 관심, 사랑, 도움 다 갚아야 하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았다고…. 

막상 급하니까 찾는 가짜 신자였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실하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마음속으로 몰래몰래 빌었다.

그랬던 나에게 형은 기도를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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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잘 비판해서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별명이 있는 덕경이 형. 그 ‘까기’ 안에는 애정이 담겨 있어, 요즘 말로 욕쟁이 할머니 같은 느

낌을 주었다. 덕경이 형은 《운수 좋은 날》에서 아픈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사기 위해 열심히 인력거를 끌던 김 첨지를 종종 생각나

게 했다. 나는 그렇게 지난 2년 간 나를 무척 챙겨주었던 송 첨지에게 참 많이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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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형이 건네준 글귀를 계속 읽었다. 저 구절 속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새겨질 때까지.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이 말은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둘만의 비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망도 곁들이며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생존본능을 기폭제 삼아 폭발하는 이기심을 가득 담은 기도를 속으로 하면서 서서히 잠들었다.


몇 번을 자다 깼을까? 아침이 되었다. 바이탈 체크를 하러 온 간호사의 인기척에 잠이 깼다. 머릿속을 채우던 여러 생각들이 제풀에 놀라 사라졌다.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간 재앙처럼 흔적도 없이. 판도라는 희망이라도 건졌건만 내 상자에는 오직 목마름만 남아있었다.


“엄마, 물 좀.”

“금식이라는데 물도 안 되는 거 아니야?”

“될 것 같은데?”

“아니지 싶은데? 이럴 줄 알고 미리 물 먹어두랬잖아.”

“저녁에 물 먹으면 또 밤에 화장실 가야 되고, 그러면 또 엄마 깨워야 하잖아.”

“엄마 일어나는 게 뭐 어때서, 엄마 괜찮다.”

“엄마는 몰라서 그래. 깊게 못 자니까 자주 화장실 가는 것도 싫은데, 화장실 갈 때마다 안 그래도 불편하게 자는 엄마 깨워야 하고.  

진짜 좀 그래. 오줌 마려워서 못 자는 기분도 들고. 그래서 어제는 물을 안


먹었는데도 계속 화장실은 가고 싶고. 뭐가 뭔지 도대체. 다 짜증나. 물 좀 줘.”

“금식인데 물 먹어도 되려나, 간호사한테 물어보고 올게.”


간호사실에 갔다 온 어머니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전했다. 

금식(禁食)이라 했으니 식(食)은 못 해도 음(飮)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물 마시기 싫다고 고집 피웠던 게 후회되었다.


‘어차피 한동안 중환자실에 있느라 밤에 부모님 깨울 일도 없을 텐데…. 잘못 생각했네.’

물마시면 안 되는 이유도 궁금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체 채팅방에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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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iration. 검색해보니 사레, 흡인이라 나왔다. 마취 깨는 도중에

위 내용물이 역류할 경우 그것이 폐로 들어갈 위험이 있어 금식하는 모양인 듯했다. 

이 와중에 옆 침대 투덜이 아저씨가 아침 식사 하는 소리가 예술이다. 

음식과 침, 혀만을 가지고 어쩌면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던데 미운 사람이 미운 짓 하니 더 신경질이 났다.


‘되게 쩝쩝거리면서 먹네. 아, 나도 물 먹고 싶다.’


수술은 12시였고 경과 관찰을 위한 MRI 촬영은 9시, 수술을 위한 이발은 11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멀쩡한 아들과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1분 1초라도 함께 보내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과는 달리 나는 MRI 검사가 반가웠다.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었다. 《모모》의 회색 신사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남은

모든 시간을 다 팔아버리리라. 그동안 할 번민, 스트레스 모두 귀찮다. 잠이라도 자서 빨리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동완아, 동완아. 좀 일어나 봐봐.”


자꾸 말을 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못난 자식은 외면했다. 

외면하는 아들의 마음을 아는 부모님과 그걸 알아도 한 번 더 외면하는 아들.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우리 가족은 긴장의 비눗방울 속에서 다가올 운명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9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간호사와 인턴이 들어왔다.


‘폴리구나….’


형들이 놀리던 것과는 다르게 여자 인턴 혼자 오지 않았다. 여자랑 남자 둘이 왔다. 하지만 부끄러운 건 똑같았다.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닌 ‘수술 대상’이다. 수치심은 사람의 것이지 수술 대상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팔을 들어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무방비가 된 하체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와 부산스런 손놀림.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눈이 절로 질끈 감기고 머금고 있던 눈물은 뺨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떨어진 눈물처럼, 세속에서의 유리(遊離)를 느꼈다.


2번이나 실패한 까닭일까? 아래가 굉장히 아팠다. 이제 막 임용된 인턴이 잘하는 게 이상한 거다. 애초에 예상한 일이었다. 

인턴 시절 할아버지에게 폴리를 꽂다가 실수로 아프게 했다며 한탄하던 명아 누나가 생각났다.


‘그래, 아무렴. 일부러 그랬을까? 자기도 잘하고 싶겠지. 안 되는 걸

어쩌누. 뭐 좋다고 외간 남자 성기를 주물럭거리고 싶겠어?’


얼마 뒤 다시 간호사들이 왔고 이동용 침대로 나를 옮겨 MRI 검사실로 이동했다. 

바닥의 요철에 침대가 튕길 때마다 아래쪽을 강타하는, 찌르는 통증은 욕지기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 놈의 인턴은 센스 더럽게 없네. MRI 검사 전에 폴리를 꽂고 지.랄이야. 

자기가 안 아파봐서 그래. 아파본 사람이면 이 타이밍에 폴리를 할 리가 없지.’


도착하자마자 링거와 폴리가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누웠다. 

이동할 때 생긴 어지러움과 아래를 강타하는 통증이 맞물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눈앞의 MRI기기가 나를 먹어치울 것만 같았다.

 

‘겉만 MRI고 실은 냉동 장치인거지. 지금 냉동인간이 되고 있는 거야.’

‘검사 끝나고 나오면 미래나 과거인거 아냐? 지금은 시공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고’

‘모든 게 꿈인 거야. 캡슐 안에서 눈을 딱 뜨면, ‘이번 게임은 별로였어’ 하며 일어나는 거지.’


거대한 장비가 주는 위압감에 상상력이 더해져 온갖 망상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는 먼 미래와 과거만 존재할 뿐 오직 현재만 없었다. 

러나 검사를 끝내고 돌아온 터널 밖 세상은 현실이었다.


덜컹거릴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며 돌아온 병실. 통증이 좀 진정되자 잘 다녀오겠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술 전 마지막 인사를

돌렸다. 먼 길 떠나는 사람처럼 메시지가 길어져 쓰기,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짧게 남겼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대사가 아무렇게나 나온 게 아님을 느낀다.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은 다 똑같다.


‘다 이야기 안 할래. 조금은 남겨둘 거야. 죽은 인물들은 할 말을 다해서 죽은 거였어. 반대로 말 못한 사람들은 다 살았어.’


쏟아지는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미신을 만들고 지킨다. 

사망을 암시할 수 있다 여겨지는 행동은 모조리 피하고 부모님 몰래 노트에 적어 두었던 통장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도 지워버렸다.


‘괜히 했다가 살아서 돌아오면 얼마나 웃기겠어. 안 해, 안 해.’


다가오는 위협 앞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들과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부모님. 

팽팽한 긴장감을 깬 사람은 수술실 의사처럼 파란 가운에 마스크까지 끼고 나타난 이발사였다. 

감염 예방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뇌수술에서 삭발은 필수. 능숙한 솜씨로 머리카락을 잘라 나갔다. 

한 뭉텅이씩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니 어릴 적 타자 연습을 하느라 지겹도록 읽었던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이 떠올랐다. 

머리카락 한 뭉치마다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그 안에 담긴 시간을 흘린다.


가위질을 하던 이발사는 바리깡을 들고 남은 머리카락을 밀기 시작했다. 

이제는 2년 전 훈련소 가기 전날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만큼 참담한 마음이었을까?  

바리깡 소리가 이내 멈추고, 가는 듯싶던 이발사는 도루코 면도칼을 꺼내 뒷마무리 작업까지 하고 떠났다. 

5중날을 자랑하는 면도기로 턱수염을 깎아도 검은 자욱이 남아있었는데, 괜히 이발사가 아닌 듯 눈썹 위로는 검은 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 강을 건너라고 외치는 카이사르의 명령에 등 떠밀려 뛰쳐나가는 병사의 처지가 이런 것일까? 

대세에 거스를 용기가 없는 겁쟁이는 그저 순응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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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멀쩡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 어머니는 사진을 찍자고 했다. 싫었다.


“무슨 영정 사진 찍어? 사진은 또 왜.”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속으로 삼켰을 말. 이 한마디가 부모님 가슴에 박힐 가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뿜었다. 김영랑 시인처럼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음먹었건만 가슴은 그만 머리를 배신하고 말았다.


간호사가 오고, 침대를 바꿔 탔다.


‘이제 가는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층층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리며, 스쳐지나가는 형광등 하나하나에 소중한 기억들을 담았다.

수술로도 없애지 못하도록…. 그랬다. 그 암울한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어쩌면 시(詩)였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시는 어두운 현실을 잠시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주는 옷가게 조명이었던 것이다.


움직이던 침대가 멈추고 수술실에 도착한 듯 침대를 끌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혼자 남겨져 있는 잠깐 동안, 만약 내가 나를 잃어버려 주변 사람을 고생시킬 거라면 수술실에서 죽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다 잘될 거예요.”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동치는 심장도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머릿속으로 ‘All is well’을 수없이 되뇌며 의사의 지시에 따라 호흡기에 대고 10번 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 이쯤이면 마취된다고 하던데?’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출처- On Board 2017 AUTUMN  ' 내려놓기 - 어느 젊은 한의사의 암 투쟁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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