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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컬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한의사다' -한의학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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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한의사다.

-

한의학의 재구성

 

벌써 세 번째 글이다. 한의학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보자는 의도로 창간호에서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한의약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인식하던 한의약이 아니며 또 그래선 안 된다. 지난 호에서는 ‘과거’로 국한되는

한의학과의 결별을 논했다. 이번 3호에서는 ‘현재’의 한의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

음 4호에서는 ‘미래’의 한의학과 한의사, 한의약이 나아갈 길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의학의 의미를 찾아 나섰던

긴 여정을 마치려고 한다.

 

01한의학의 재현 가능성

 

한의학은 이론적 근거를 원전으로부터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만일 원전이 모두 없어진다면, 우리는 한의학의 이론들을 다시 획득할 수 있을까?

 

《한비자》에 등장하는 다음 고사는 주로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를 비판할 때 인용된다.

 

정나라에 신발을 사려던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의 발 길이를 잰

후 그걸 가지고 시장에 가려 했으나, 깜빡하고 놓고 왔다. 그리곤

시장에 도착해 신발을 쥐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발 길이 잰 것을 놓고 왔으니 돌아가서 가져오겠소.”

그리고 돌아와 보니 이미 시장은 파했고 끝내 신발을 살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직접 발로 신어보면 될 것이 아니오?”


그 정나라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길이를 잰 것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습니다.”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而置之其坐 至之市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 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也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① 미주참조

 

역사적으로 우연이나 행운이 발명, 발견의 중요한 계기가 된 사례는 매우 많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이 없었다고 해서 특정 과학 법칙이 발견되지 않았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윈이 없었다면 진화론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아인슈타인이 없었다면 상대성이론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많은 지식은 독립적인 과학자들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뉴튼과 라이프니츠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미적분학을 발명했으며,

1800년대에 멘델이 발견한 유전법칙은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1900년대가 되어서 유럽의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재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슷한 과학적 내용들이 재발견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현상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자연에 적용하여 반복적으로 같은 결과를 보이는 것, 이것이 ‘과학의 재현가능성’이다.

마찬가지로 인체에 적용하여 반복적으로 효과를 보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의학의 재현 가능성’이다. 

한의학이 원전 안에만 있고 재현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는 문헌학일 뿐 과학의 한 분야로서의 의학이라고 할 수 없다. 

과거의 의학 지식인 한의학의 재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가장 쉽고 명쾌한 방법은 근거 중심적으로 한의학 진료의 효과를 증명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재현가능성을 꾸준히 확보한 현대 과학 체계에 한의학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앞서 나온 한비자의 고사는 법가(法家)의 입장에서 유가(儒家)를 비판하기 위해 고도의 은유를 담아 쓴 글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유가가 과거 주나라의 것만을 최상으로 여길 뿐,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함을 비판하고자 위의 이야기를 책에 수록했다.

차치리(정나라 사람)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발로 항상 탁본을 새로 뜰 수 있듯이,

우리는 지금의 인체와 지금의 한의약을 이용해서 항상 다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02근거중심의학과 한의학

 

근거중심의학의 평가법을 활용하면 순전히 한의학적 변증 내에서 한의학적 처치의 효과를 알아볼 수 있다.

원전만을 숭배하는 극단적인 한의학 본질론자가 아니라면 선호할 만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근거중심의학만을 활용하여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첫 번째 가장 큰 문제는 시간과 자본, 인력의 제약이다.

주류의학(conventional medicine)의 내용들조차 일일이 근거중심의학적으로 그 근거를 마련하기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의학이 아닌 한의학의 치료 과정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까지 적잖은 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연구들만으로는 다빈도 질환에 사용되는 빈용 처방의 효과에 대해 잠정적결론조차 내리기 불충분한 실정이다.

만약 한의약 근거중심 연구의 전망이 밝다고 하더라도, 그런 연구가 언제쯤 충분히 탄력을 받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요원한 상태라고 평가하고 싶다.

 

두 번째는 진단 처치의 효과 판정 외 다른 부분에서의 한의학적 의문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이 기존의 생의학적 모델에서 완전히 페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생의학적 바탕은 유지하되 추가적이고 보완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측면에서 근거중심의학이 가치를 지닌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03

생의학적 한의학:

패러다임과 공약불가능성

 

 

1) 몸이 마르면서,

2) 하지에 부종이 있고, 말단이 차갑다. 소변량이 감소한다.

3) 숨이 짧고, 마른 기침을 하며

4) 쉽게 피로해하고, 운동 능력이 저하되어 있으며

5) 입맛이 없고, 배가 부른 느낌이다.


이 환자를 어떻게 변증(辨證)할 것인가? 1)을 보면 ‘음허(陰虛)’를 떠올리기 쉽다. 

2)를 보면 양허(陽虛)이되 특히 하지에 집중되므로 신양허(腎陽虛)의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3)을 보면 전반적인 폐허(肺虛)가 보이고, 4)는 전신적 기허 5)와 함께 보자면 비위(脾胃)의 기(氣)가 허하다고 볼 수 있다.

 

처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맥문동(麥門冬)이 들어간 처방으로 비폐(脾肺)의 음(陰)과 기(氣)를 보충하고,

2)의 증상이 심하다면 신양허로 보아 부자(附子)가 들어간 처방이 적당해 보인다.

 

영란(鈴蘭)이라는 한약재가 있다. 은방울꽃(Convallaria keiskei)이다. 

하지만 이 영란은 매우 독한 극약으로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다. 

영란을 그냥 사용하면 대개 오심과 구토가 발생하며, 섬망, 황시증과 같은 시각 이상을 보이다 쓰러져 죽게 된다.

그 증상의 이면에는 영란이 함유하고 있는 콘발로사이드(convalloside)라는 카르데놀라이드계 강심배당체가 있다.

맥문동은 이전에는 은방울꽃과 같은 속(Convallaria)에 속했었다.1)

그리고 대표적인 약리 활성 물질 역시 강심배당체인 콘발라톡신(convallatoxin)이나 콘발라마린(convallamarin)이다.

 

부자의 아코니틴(aconitine)이 나트륨-칼륨 펌프(Na+/K+ pump)에 작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강심배당체와 같고, 히게나민(higena

mine)이 베타 효현제의 작용을 가지고 있어 부자 역시 뚜렷한 강심효과가 있다.

 

사실 1)~5)는 임상지침에서 발췌한 전형적인 심부전의 증상들이다.2)

이 자리에서 비폐의 음허와 신양허 등의 변증이 심부전과 상동한 것이라고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한 한의약 변증과 처방의 모든 본초 구성이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뚜렷한 일관성을 가진 병태생리학적 정보와 약리학적 지식이 한의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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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의학과 생의학은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절대적 명제인 양 믿고 있다.

왜냐하면 대중적으로 유명한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에 대해 설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약불가능성 개념은 가장 격렬한 논란을 낳은 주제 중 하나이며, 퍼트넘(Hilary Putnam), 파이어아벤트(PaulFeyerabend) 등의 비판 이후

쿤이 자신의 주장을 축소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현재 이 이론은 거의 폐기된 상태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적절한 번역과정을 통해 꽤나 성공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쿤의 제자였던 피터 갤리슨은 “교역지대(trading zone)”3)와 “크리올어화(creolization)”4)라는 개념을 통해 과학과 과학,

과학과 기술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 사이에서 교류와 혼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현대 과학에서 패러다임 간 공약불가능성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잃었다.

 

04

표현의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

 

한의학을 잘 활용하려면 한의학 용어를 위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국악의 음정은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활용하므로,

같은 열두 음을 사용하더라도 평균율과 조화율로 음의 기준을 잡는 서양음계의 음정과는 조금 다르다.

 

따라서 한 옥타브 내에서 각각 삼분손익법과 평균조화율로 12음을 정하더라도 음 사이의 간격은 다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차이는 정말로 전문가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미세한 차이이다.

즉 한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의학의 용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구체적 이익이 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문화권마다 무지개의 색의 개수를 따지는 방식이 다르다.

현대 한국에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칠색 무지개가 보편적이지만 음양오행이 보편적이었던 과거 동양권에서는 오방색으로 무지개를 표현하였다. 

 

서구권에서는 남색이 제외된 육색 무지개로 보는 경우가 흔하고,

몇몇 아프리카에서는 무지개가 두세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소리도, 색깔도 결국에는 파동의 진동수에 의해 결정된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무지개의 색도 무한개이고, 한 옥타브 내에서 음(音)의 개

수도 무한개이다. 온음계보다는 반음계가, 반음계보다는 다시 그 사이 음들을 표현할 수 있는 신디사이저를 활용할 때 음악은 더 다채로운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또 일곱 가지 색을 넘어 주파수로 표현한 수십 수백개의 색이 담긴 색상표로 무지개를 표현하면 더욱 현실에 가까운 무지개를 그려낼 수 있다.

 

고전들은 고대에 쓰인 용어와 문체를 활용하여 서술되어 있다.

당연히 그 용어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그 의미를 알아야 그 고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고대의 과학적 용어인 음양오행이나 삼음삼양(三陰三陽)을 현대의 서구 과학과 대응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5)

하지만 서로 다른 용어를 대응시킨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내경(內經)》에 인용된 ‘기(氣)’의 의미

만 팔십여 가지에 달한다는 연구가 있다. 우리는 운기학(運氣學)에서 말하는 태양한수(太陽寒水)의 ‘태양’과 경혈학(經穴學) 태양경(太陽

經)에서의 ‘태양’, 《상한론(傷寒論)》 태양병(太陽病)에서의 ‘태양’이 어떤 차원에서 같은 ‘태양’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고대 용어들은 대

개 감각적인 일상적 용어와 조작적 정의가 이루어진 과학적 용어 사이에 명확히 구분이 없다.

 연구 대상을 규정하기 위한 실제적 구체(具體)를 확보하는 데부터 어려움이 있으리란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전을 읽고 한의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사실 한의학자의 몫이지, 임상 한의사의 몫은 아니다. 한의학자에게 고전의 표현 방법은 의미가

클 수 있지만, 임상의 한의사에게는 환자에게 발생하는 현상을 제대로 학습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은 물고기까지 잡고 싶다면 가능한 그물코는 작고 촘촘한 것이 좋다. 

물고기가 그 그물코 사이를 빠져나가 버린다면 더 이상 그 그물은 의미가 없다.

 

 

05

한의학의 정체성 마련하기

 

그럼 도대체 한의학과 양의학의 다른 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체라는 같은 대상을 두고 똑같은 방법론을 통해 지식을 획득했기 때문에 

양자가 같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과장된 관점이다. 양자 사이의 중간과 겹침이 없는 배타적 영역을 찾아냄으로써

한의학과 양의학의 정체성을 밝혀내려고 한다면 이 역시 잘못된 시도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정의’라는 단어를 보면 한국의 문과생은 ‘正義’를 떠올리고, 이과생은 ‘定意’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의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은 구성된 내용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다르게 구성된 내용으로 학습된 내용들이 결국 인체를 다르게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이것이 한의학과 양의학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합리적인 방법은 귀납과 연역 단 두 가지다. 굳이 분류하자면 귀납은 근거중심의학으로, 연역은 생의학이라는 방법론으로 불리는 것이다. 

한의학의 본질이 원전기반적이며, 깨달음을 요하며, 난해하고 신비한 데에 있다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의학이 양의학과 다르다면

우리는 한의학을 학문이자 의학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 ① 미주를 빌려 그 정나라 사람을 옹호하는 내용의 글을 잠깐 써보고자 한다. 신발을 사서 신다보면 신발을 감싸는 갑피가 늘어나 신발이 헐거워지는 경우

를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처음에는 살짝 조이는 듯한 신발이 시간이 지날수록 외려 발에 알맞아지는 반면 처음에 꼭 맞는 신발은 나중에 조금 헐거워진

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제작된 신발에 갑피가 늘어난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발의 치수를 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면 정나라 사람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얼토당토않은 이론을 바탕으로 한 치료가 효과를 보았으므로, 자신의 이론이 합리적이며 유효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증례 보고 이면을 살펴보면, 실제 진단 과정에서 문제가 있거나, 병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우연하게 적절한 치료법이 선택된 경우도

많다. 게다가 환자가 병행한 다른 치료나 심리 상태의 변화, 시술자의 태도 등 너무나도 많은 변수들이 치료에 효과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

문에 근거중심의학은 특정 행위의 치료 효과를 평가할 때 편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지금 당장 시행한 특정한 시술 이후 어떠한

결과가 몇 회 도출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수한 치료행위라 주장하는 것은 지금 신발을 신었는데 그때 잠시 꼭 맞는다고 해서 그 신발이 알맞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신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날 수 있다. 쓸만한 치료법이란 대개 이론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릇된 편향을 억제하여 평

가받고, 그 후에도 여러 번 객관적으로 그 효과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것들이다.

 

“其妻問曰 今褲何如 夫曰 象吾故褲 妻子因毁新 令如故褲”

 

부인이 바지를 어떻게 만들어줄까 묻자,

남편은 옛것과 같은 걸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부인은 새것을 일부러 망가뜨려 옛것과 같이 만들었다.

- 한비자, 《한비자》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뒤에는 그 사다리는 던져버려라.”

-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논고》

 

“상이한 과학들 사이에 소통은 전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다. ……

과학이 이렇게 복잡하고 ‘지저분한’(messy) 인간의

활동이라는 사실은 과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튼튼하게 만든다.”

- 홍성욱, 《과학으로 생각한다 :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

 

 

 

안녕하세요. 조금씩 철학 공부를 하고 있는 임상한의사 ‘슈루룩’입니다. 철학

을 잘 알면 행복해질까 싶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인지 덜 행복한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씩 발견한 행복의 조각들을 나누고 싶

었습니다. 제 글이 한의사의 마음과 동떨어진 철학이 아닌, 실제 한의사에게

 

힘이 되는, 그런 든든한 한 끼 밥과 같은 철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일 : misodoong@hanmail.net

블로그 : http://blog.daum.net/onboardphilosophy

 

저자 후기 및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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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On Board 2017 SUMMER ' 나는 생각한다. 고로 한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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